남명 조식(1501 ~ 1572) 선생은 산청이 배출한 인물 중에 그 족적이 가장 뚜렷한 사람 중 한 분으로, 실천적 학문으로 국가의 많은 인재를 가르쳤던 분이다.
산청군 시천면에는 남명 조식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남명기념관'과 '산천재', '덕천서원'과 '세심정' 등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우리의 역사를 현장에서 체험하는 여행... 반려견과 함께라면 더욱 의미 있을 여행이 될 '산청 남명 조식 유적지'를 소개한다.
남명 조식 유적지는 크게 두 곳으로 나눌 수 있다.
한 곳은 남명 조식 선생을 기념해 건립한 '남명기념관'과 선생이 기거하던 '산천재'가 있는 지역이고, 다른 한 곳은 선생의 제자들이 건립한 '덕천서원'과 휴식장소인 '세심정'이 있는 지역이다.
먼저 남명기념관과 산천재를 살펴보자.
남명기념관과 산천재
남명기념관에 도착하면 '산청 조식 유적지'에 대한 안내문을 볼 수 있고, 정문을 지나면 정면으로는 전시관을, 좌측으로는 남명 조식 선생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전시관 안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걸어온 발자취와 제자들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되어 있다. 제자 가운데 '홍의장군'이라 불리는 곽재우 장군도 계셨는데, 익히 들어본 장군이라 무척 반가웠다.
남명기념관을 방문한 날, 때마침 어르신분들도 기념관을 관람하고 계셨는데, 문화해설사를 통해 설명을 듣고 계셨다... 문화해설사분이 설명을 오래 하셨는데, 귀동냥이라도 할 걸 그랬나보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수박 겉핥듯 전시실을 둘러보고는 나왔다.
전시실을 나와 남명기념관 야외를 한바퀴 산책한 후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산천재로 향한다.
남명기념관에서 봤을 때 도로 반대편에 있는 '산천재'는 남명 조식 선생이 기거하던 곳이다. 도로를 건너가 옆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을 살펴본다.
산천재(山天齋)
이곳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이 61세 때부터 돌아가실 때 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장소이다.
산천(山天)이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의 괘상으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생은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국왕에게 세 차례 글을 올려,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건의하였다.
아하! 이곳이 바로 남명 조식 선생이 61세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머무르시던 곳이구나... 어떤 모습일까?
산천재로 가는 길을 따라 입구로 들어가는 매화나무 한 그루와 한옥이 보인다. 매화나무 옆에 안내문이 있어 살펴보니, 이 나무가 바로 '남명매'라고 한다.
남명매(南冥梅)
이 매화나무는 남명조식(南冥曺植 1501년 ~ 1572년) 선생이 61세에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뜰에다 심은 것이라 전한다. 기품있는 모습은 선비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남명매라 부른다.
참고로 산청에는 '산천재 남명매', '단속사지 정당매', '남사마을 원정매' 등 산청 3매가 있다.
고결한 선비정신 품은 산청 3매
- 산천재 남명매... 남명 조식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낸 산천재의 뜰에 선생이 직접 심은 매화나무로 수령은 450년 가령 되었으며, 옥같이 맑고 얼음같이 투명한 남명 선생의 기개를 이어나가고 있다.
- 단속사지 정당매...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에 있는 정당매는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낸 통정공 항화백(1357 ~ 1402)이 어린시절 글공부를 할 때 심었다고 하며, 현재는 그 후계목들이 선비의 지조를 되새겨 주고 있다.
- 남사마을 원정매... 남사예담촌 하씨 고택에는 고려 후기 문신인 원정공하즙(1303 ~ 1380)이 심어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으며, 700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밑동 가지에서 피어나는 원정매의 향기가 진하게 코끝에 남는다.
산청 3매 가운데 하나인 '산천재 남명매'를 오늘 만나게 된 것이다.
산천재를 한바퀴 둘러보며 산책을 한다. 공간이 그리 넓지는 않고, 담장을 따라 마당, 뜰, 그리고 강당과 제자들이 머물던 생활공간이 보인다.
남명기념관이 이렇게 산천재 옆에 건립된 것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남명 조식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낸 이 공간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우리네 역사 그 자체'라 생각한다.
남명기념관과 산천재를 둘러보고, 이번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을 보러 함께 가보자.
덕천서원과 세심정
덕천서원에 도착했다. 입구에 있는 안내문을 살펴보니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산청 덕천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 기능을 수행하던 조선시대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산청 덕천서원은 선조 9년 (1576)에 남명 조식(1501 ~ 1572)의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되었고, 광해군 원년(1609) '덕천'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를 국가로부터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20년에 복원되었다.
서원의 정문인 시정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경의당을 중심으로 그 앞에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진덕재, 수업재가 있고 뒤편에 제례를 지내는 사당인 숭덕사가 배치되어 있다.
경의당은 마을을 올바르게 하는 '경'과 그것을 실천하는 '의'를 중요시하였던 남명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경의당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현재도 봄, 가을에 두 차례의 향례를 올리고 있으며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남명제를 지내고 있다.
아하! 이곳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4년 뒤에 제자들이 건립한 서원이구나.
정문인 시정문, 강당인 경의당, 유생들의 생활공간 진덕재와 수업재, 사당인 숭덕사... 각각의 건물과 문에도 이름이 다 있구나!
정문(시정문)에 들어서니 강당(경의당)과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진덕재, 수업재 등이 보인다.
이곳에서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다시 자신의 후학을 양성했던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이 제자와 그 제자의 제자들에 의해 이어졌던 것이다.
경의당에서 앞마당을 내려다 본다... 아마 그 옛날 남명 조식의 제자도 이 자리에서 유생들을 바라봤겠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바라봤을까.
강당(경의당) 뒤편으로 제례를 지내는 사당( 숭덕사)이 있는데, 그 길에 대문이 있다.
대문을 지나니 숭덕사가 보인다. 숭덕사에는 선생의 위폐가 모셔져 있고 봄, 가을로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남명제'가 열린다고 한다.
숭덕사를 나와 유생들이 머물던 '진덕재'와 '수업재' 주변을 산책한다... 요즘이라면 학교 기숙사에 해당하는 공간이라 할텐데, 과거 유생들은 이곳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궁금하다.
덕천서원을 둘러보고 정문(시정문)을 나와 도로 건너편에 있는 세심정으로 걸어간다.
세심정은 유생들이 휴식하던 공간에 세워져있는 정자다. 세심정 아래로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아마 유생들도 글 공부만 한 게 아니라, 이렇게 세심정에 나와 휴식도 하고 강물에서 물놀이도 즐겼으리라... 과거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세심정과 강물을 보며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대한 스승 남명 조식의 발자취를 따라 산청을 여행했는데, 선생의 발자취는 남명기념관과 산천재, 그리고 덕천서원과 세심정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중년의 나이지만 아마 역사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와 같은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이런 모습을 리얼하게 설명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는 그걸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남명 조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산천 여행... 이번 여행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 역사와 문화의 뿌리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된 여행이었다.
그리고 이 멋진 여행에 반려인 여러분도 초대한다... 사랑하는 반려견과 함께 역사 속 현장도 산책하고, 아름다운 산청의 자연도 만나보기를 권하면서 말이다.